봉암사역사
..▶ 봉암사 창건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_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 제 49대 헌강왕은 화풍으로 소폐하고 혜해로 유고할 유신정치를 뜻하고 이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 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선이었다.

..▶ 중창불사

...그후 봉암사는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그런데 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된 것을 불기 2499년(1955) 금색전 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의 도량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불기 2526년(1982)부터 종립선원으로 희양산 남쪽 너른터에 자리하고 있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로고 있어 예로 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 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 선원의 역사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된다. 그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여간 납자를 제접하여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그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스님을 다시 조실로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년 3월 29일 날 열반에 드셨습니다.